본인이 목사가 된 가장 큰 동기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입니다.[1]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고,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구약 성경의 에스라서를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품었던 생각입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에스라 7:10).  이 말씀은 본인의 목회현장에서 떠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이 말씀에 대한 감격과 감동은 어린시절 부터 조금씩 본인의 삶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코흘리개 어린시절 본인은 여름을 기다렸습니다. 서울에서 천사들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그만 시골 동네의 여름 성경학교를 돕기 위해 서울에서 오신 선생님들은 영락없는 천사들 이였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피부도 뽀얗고, 율동도 너무나 멋지고….  그런 천사들이 전해 주던 말씀,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천사들의 복음은(요 3: 16) 너무나 달콤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 천사들은 까까머리 시골 촌뜨기 어린 아이인 저를  앉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 했습니다.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본인은  이 천사와 같은 선생님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습니다.

대략 6년 후, 서울에서 제가 출석하던 시골 교회로 전도사님께서 부임하셨습니다 (당시 전도사님 이셨던 전재길 목사님은 현재 은퇴 하시고 뉴욕에서 거주하십니다. 현재도 연락을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의 목회를 배우고 있습니다). 일류대학을 나오시고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다가 나중에 신학 공부를 하신 후 시골 교회로 부임하셨습니다. 찬양도 잘하시고 운동도 잘하셨습니다. 저희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들판에서는 시골 어른들과 어울리시며 농사일도 거두셨습니다. 그런 전도사님을 교회를 다니시지 않던 동네 어른들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빨간색  오토바이를 타고 이 동네 저 동네 돌아 다니시며 삶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더욱이, 그분의 성경공부는 본인에게 말씀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칭의… 나중에 신학교에 다닐 때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분의 성경공부는 신학교에서 배우는  조직 신학의  개요에 가까웠습니다.  그 시절 본인은 그분 처럼 말씀을 공부하여 사랑으로 삶 속에서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 해  겨울 일산 YMCA에 있었던 청소년 부흥집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과의 시간은 또 다른 세상 이었습니다. 그 생경함을 뒤로하고 저녁 집회는 저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막연했던 목사로의 길이 분명한 확신으로 바뀌는 시간이었습니다. 말씀 집회를 인도 하시던 목사님은 집회 후 목사가 되기로 서원한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후 깜짝 놀랐습니다. 제 손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전 아직도 그때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재길 전도사님과 이 일에 대해 상담을 했을때,  전도사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준비 해야 할 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전도사님은 에스라서의 말씀 (에스라 7:10)을 들려 주셨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랑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는 이 사실을 서서히 말씀드려서 나중에 놀라지 않으시게 해야하며, 효과적인 학업을 위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목사의 꿈을 품고 사는 중학생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학교에 밴드부가 생겼고 트럼펫에 심취 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모리스 앙드레 (Maurice Andre)와장 끌로드 보렐리(Jean-Claude Borelly)라는 트럼펫 연주자의 연주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전도사님의 아들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전재길 전도사님의  아들과 같은 학년 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계속 음악을 해서 서울 예고와 연대음학과를 거쳐 뉴욕 맨하탄 음대에서 공부 했습니다)과 교회에서 함께 연주를 했습니다. 그러나 뮤지션의 꿈이 모락 모락 피어 오를 즈음 하나님께서는 그 꿈을 접도록 하셨습니다. 음악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중에 하나인  손가락에 상처를 주셨습니다. 사고로 오른손 중지가 0.3cm 정도 잘리게 되었습니다. 주의 깊게 살펴 보지 않으면 인식하기 어려운 상처 이지만, 그 상처는저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는 소중한 소명의 흔적’이 였습니다.  그 사건 이후  단 한번도 목사로 부르신것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집안의 별 다른 반대 없이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신학교의 생활은 목사로서 부르심을 확인하고 준비하는  또 다른 감격의 시절 이었습니다. 당시 침신대의 새로운 캠퍼스는  공부와 기도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새로 이사한 하기동 (대전시 유성구)에는 식당 2곳외에는 아무런 편의 시설이 없었고, 대전의 유성 시내로 갈 수 있는  교통 수단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한 아침 7:30부터 저녁 9:30까지 학교에서 공부와 기도로 지냈습니다.  성경, 철학[2], 그리고 전재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머리는 차겁게, 가슴은 뜨거운 목사”로서  준비되기 위한 훈련장이었습니다.  교수님들의 가르침, 선배들과의 대화, 교회에서의 사역은 목사로 부르심에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특히 박영철 교수님의 “셀 교회” 과목을 통해 척박한 목회 현실 속에서 미래 목회에 대한 희망을 보았습니다. 성도가 “가족처럼이 아닌 가족이 되는 목회”는 본인이 목회에 대한 소명과 소망의 불씨를 더욱더 타오르게 했습니다.

몇 년전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에 방점을 찍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10여년 동안 사역하던 대전 도마동 침례교회의 담임목사 청빙 위원회의 내부 추천 (최영환 집사, 당시 청빙 위원회 부위원장, 현 계룡건설 고문)으로 45여명 후보중에서 최종후보 3인이 되었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소중한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것은  목회의 소명과 사명이었습니다.  제 인생의 “중간 고사” 기간 이었던 그 시기에 다시 한번 더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학사 에스라처럼 말씀을 연구하여 정확하게 가르치는 사역, 그 말씀 대로 사랑하며 섬기는 삶은 본인이 목사로서의  삶에 동기이자  최고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본인은 목사로서 목회의 현장에서  어린시절 까까머리 촌뜨기를 끌어안고 눈물로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을 전하시던 천사같은 선생님들을  떠올립니다.  윤택한 삶을 내려 놓고 시골로 오셔서 말씀으로 본을 보이셨던  전재길 목사님을 마음에 품고 삽니다. 박영철 교수님의 가르침 처럼 교회에서 함께 하는이들과  “가족처럼이 아닌 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오기 전  9여년 동안 대전 도마동 침례교회에서 사역 할때도,  5년동안  섬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 명지 침례교회지역)에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아이들을 모아  여름 성경 학교를 인도 하였을 때에도,  그리고  뉴멕시코에서 코흘리개 인디언 아이들을 품고 말씀을 전할때에도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4년 넘게 주말마다 달라스에서 어스틴을 오가며 사역 할때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목사로 섬겼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몰아가심으로 개척한 우리교회에서 주님의 말씀과 사랑때문에  행복한 목사로 목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고,  그 사랑을 삶으로 전하는 것은 목사가 된  동기이자, 목사로서의 당연한 목표입니다: “Teach Truth and Love Well!”

                 [1] 본인의  목회 동기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은 본인의 목회 철학과 일맥 상통합니다. 소통을 통한 회복목회”(Restoration Ministry  Through Communication)는 말씀으로 하나님과 정직하게 소통하는것과 그로 인한 감동, 즉 예수님의 사랑이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2]본인은 배국원교수님의 철학 강의를  통해 신학함의 진지함과 즐거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말씀(The Text ) 뿐만 아니라 상황( context)과도 원할하게 소통(communication)해야함을 깨달았습니다. 게다가, 교수님의 강의는 더 많은 철학자와의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철학적 탐구등), 칸드(순수이성 비판등), 케에르케고르와의 교제는 시대를 읽는 지평을 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